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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자들도 받아들이기 힘든 나훈아의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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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ielalochte01 2023. 6. 10.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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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나훈아는 '트로트 황제'로 불리지만, 그는 그냥 '나훈아'라는 호칭을 원했습니다. 보통 나훈아로 불리는 것조차 그에게는 불편한 것이었죠. 그래서 그런지 50여 년의 가수 인생 중 거의 20년 가까이 노래를 적기도 했습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그에게는 평생 극복하기 힘든 딜레마가 있었습니다. 나훈아는 아직까지 나이 논란이 있는 미스테리한 가수입니다. 1947년생으로 익히 알려져 있지만, 호적상에는 1951년생이라고 합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호랑이 그림 화가로 유명한 이목일 씨도 1951년생이라고 해요. 16살 17살의 나이에 데뷔했는데, 너무 어려워서 그리고 남진 씨와의 라이벌 구두를 만들기 위해 나이를 올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본명은 최홍기이며, 고향은 부산입니다. 남진씨 비해 잘 쓰는 집은 아니었지만, 그 또한 매우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제일 큰 무역선 마도를 운용하시며 무역업도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가난하여 밥 먹기도 힘들었던 50년대 집에는 축음기까지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주먹이 세고 불의를 보면 참을 수 없는 성격이셨으나, 반대로 감수성이 풍부하며 노래와 예술 분야에서 놀라운 재능을 보였습니다. 중학생 시절에는 야구부 4번 타자로 활약하던 그는 야구방망이로 동네 아이들을 정리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5학년 6학년 때는 부산시 교육위원회에서 개최한 콩쿠르 대회에서 2년 연속으로 1등을 차지했습니다. 그 후, 꿈이었던 성악가의 길을 걷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서라벌 예술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며, 노래를 잘하는 조용한 아이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또한, 공부도 꽤 잘하는 편이었으며, 아버지는 그가 의사나 판검사가 되길 바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수가 되기까지는 이야기가 좀 다릅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 바로 옆 정릉에서 음악학원을 운영하던 작곡가 심영섭씨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학원을 방문하여 가끔 노래를 부르던 그에게 우연히 심영섭씨가 들어서 그의 노래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심영섭씨의 추천으로 오아시스 레코드사와 인연을 맺게 되어 한국 가요사의 대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첫 데뷔 곡으로는 '내 사랑'이라는 곡이 있었으며, 그 후 '천리길'을 냈는데, 이 곡으로 큰 성공을 거두며 거의 신이시절이 된 셈입니다. 더불어, 다른 곡들도 줄줄이 인기를 끌며 가수 나훈아를 널리 알리게 되었던 '사랑은 눈물이야' 노래도 그가 부른 곡 중 하나입니다. 이렇게 잘 나가고 있었지만 부모님 몰래 가수가 되었기 때문에 집에서는 전혀 모르셨다고 합니다. 특히 본명으로 활동한 것이 아니라 예명 나훈아를 사용했고 더구나 아버지는 외국에 계셨어요.

 

나훈아 씨를 만나기 전 오아시스 레코드사는 빚에 넘어갈 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노래가 히트하면서 빚을 다 갚고 벌떡 일어서게 되었다고 해요. 사장은 나훈아 씨가 집안 얘기를 안 해서 못 사는 줄 알고 못 살 한 가마를 짚으실고 돈 50만원을 봉투에 넣어 가지고 그의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기 위해 부산 집으로 내려갔습니다. 그제서야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난리를 치셨고 사장은 쫓겨나듯이 서울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또한 아버지는 나훈아 씨를 아버지 친구가 경영하는 병원에 집어넣어 버립니다. 가수 활동을 못하게 하려고 그런데 이번에 검사해 보니 놀랍게도 그의 폐가 진짜 안 좋았대요. 그때 강제로 입원한 김에 치료를 받아서 다 나았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가수 활동을 죽어라 반대하셨지만 그때 폐가 안 좋은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의 가수 생활이 과연 가능했을까 생각하니 참으로 신기하면서도 그가 평생 아버지의 은혜를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나훈아 씨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정신적인 상처를 입히게 됩니다. 차차 말씀드릴게요. 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히트곡과 앨범을 냈는데요. 히트곡만 무려 120곡이 넘고 앨범 발표 수만 해도 무려 200장 이상, 800곡 이상의 자작곡을 포함해서 2600곡 정도의 출입국을 자랑합니다. 한 가수가 평생 히트곡을 한두개도 가지기 힘든 것을 생각하면 실로 어마어마하다고 할 수 있겠죠.

 

또한, 히트곡 대부분을 그가 직접 작사 작곡해서 저작권료 또한 상상을 초월합니다. 한 달에 5천에서 1억 정도가 나온다고 해요. 그러면 저작권료만 따져도 1년이면 6억에서 12억이나 되는데, 인기 작곡가라고 해도 1년에 1억 나오기도 힘든 것 같아요. 하지만, 그는 신계급이죠. 그의 히트곡들이 너무 많아서 몇 곡만 잠시 들려드릴게요. "내가 숨은 다음 주판을 알아" 그의 가수 초창기는 묵직하고 중후한 저음으로 노래를 깨끗하고 부드럽게 불렀으나, 점점 그의 특유의 창법인 꺾기가 들어가며 심장을 후벼파는 호소력이 강해집니다.

 

그리고 갑자기 당대 최고의 영화배우 김지민 씨와 결혼합니다. 함께 사는 동안 거의 8년간 노래를 접었다가, 1981년 대동강 편지로 복귀하고, 1982년 울긴 왜 울어로 다시 본궤도에 올라갑니다. 나훈아 씨는 1984년 일본에 진출합니다. 엔카와 트로트은 겉으로는 비슷하게 보이지만, 바다로만 둘러싼 섬나라 일본의 전통가요인 엔카와 대륙으로 통하는 우리나라 전통가요 트로트은 음악적으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질 자체가 달라서, 한국 가수가 일본에서 성공하기는 힘들다는 이야기가 있었죠. 일본에서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외치는 한국 가수가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다는 일도 있었습니다. 1980년대 후반이 되면서, 이 가수는 TV 출연을 거의 하지 않게 되었고, 연말 특집이나 공연에서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히트한 노래들은 '아 몰라', '도대체 왜', '살다보면 나에게', '일러주지 생각이 세우며' 등입니다.

 

어머니가 즐거워하는 모습은 어린 아들을 더욱 신명나게 했고, 그때 여러 가지 악기를 배워서 나중에 공연할 때 북두치고 칼춤도 추웠다고 합니다. 이렇게 나훈아 스타일의 독특한 창법, 다이내믹한 에너지, 카리스마 등 그의 노래와 공연 예술이 주는 매력은 무궁무진합니다. 그러나 50년이 넘는 그의 노래 인생은 위대했지만, 공백기 또한 만만치 않았습니다. 무려 20년 가까운 세월을 노래를 하지 않았죠.

 

1972년 나훈아 씨는 한 공연에서 찻집의 고독을 부르다가, 한 괴한에 의해 얼굴을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되었습니다. 정신적으로 너무 힘든 상태에서 바로 다음 해인 1973년, 그는 정격적으로 공군에 입대했는데요. 이때 직전 이모씨와 결혼했고, 그녀는 당시 유명 영화배우 고은아 씨의 사촌이었습니다. 2년 뒤인 1975년에 이혼을 하게 되었는데요. 이혼 당시 그는 저녁을 1년 남겨두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결혼은 군 생활 중에 했었습니다. 생활은 그다지 풍부하지 않았지만, 첫 번째 이혼 이후 마침내 두 번째 결혼을 했습니다. 1976년 김지미 씨와 결혼 발표를 하면서, 나훈아 씨와 함께 한때 최고의 배우로 손꼽혔습니다. 그러나, 나이차가 10살 이상이었던 김지미 씨와의 결혼은 당시에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김지미 씨와 함께 대전에서 초혼이라는 식당을 운영하며, 연예계 생활을 접고 행복하게 살아갔습니다.

 

하지만, 나훈아 씨가 1981년 대동강 편지를 발표한 이후, 가요계 복귀를 하면서 이혼을 하게 됩니다. 그녀는 이혼 후 1년 만에 세 번째 결혼을 하게 되는데, 후배 가수인 정수경 씨와 함께 동거하며 첫 아들을 낳았습니다. 정수경 씨와의 결혼 당시, 나훈아 씨는 14살 차이가 났습니다.

 

당시 나온 노래가 나훈아 씨의 대표곡 중 하나인 '사랑이죠'.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1남 1녀를 두며 단란하게 사는 듯 보였지만, 2011년 시작된 이혼 소송은 무려 5년 만에 종지부를 찍으며 결국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 나훈아 씨는 자맹 중이었어요. 2006년 데뷔 40주년 공연을 마친 후 대중은 더 이상 마이크를 잡은 나훈아 씨의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투경찰부터 후배 여배우와의 염문설, 강도 높은 루머가 판쳤죠.

 

결국 2008년 초 그는 대중과 언론 앞에 다시 섰어요. 공식 기자회견을 열고 각종 의혹에 조목조목 반박하며 바지 지퍼를 내리겠다는 초강수를 두며 모든 루머를 잠재워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10여년의 자명을 이어갔어요. 2017년에 다시 트로트 황제로 기반하며 여러 가지 소문에 매해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2020년에는 코로나로 지친 국민들을 위로하기 위한 통 큰 공연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죠.

 

사실 그의 공연료는 부르는 게 값인데 무료 공연으로 더욱 큰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이렇게 그의 사생활은 순탄치 않아 가수로서 긴 공백기를 가지고 된 점이 있는 것 같은데요.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의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있는데요, 정말 믿을 수 없는 말을 합니다. 그는 2002년 월간조선 인터뷰에서 이렇게 폭탄 고백을 했어요. "난 노래 부르는 걸 싫어한다는 겁니다. 노래하기 싫었어요.

 

다른 사람이 들으면 이해가 안 갈지 모르지만, 만약 제가 다시 태어난다면 저는 노래는 죽어도 안 부를 것 같습니다. 김지미 씨와 함께 살면서 노래를 접었는데요. 그 때 정말 노래 부르기가 싫어서 그만둬버렸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남자로 태어나 얼굴에 분칠하는 걸 조차 싫어했다고 해요. 그런 성향이었으니 당연히…

 

나훈아 씨의 노래가 히트하면서 대중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며 일탈을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에 괴로운 속마음을 계속해서 털어놓았습니다. 이 직업을 싫어하기 때문에 자신 속에서 빠져나와 볼 수 있는 거라고 말했습니다. 인기에 빠져 있으면 관리가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겠죠.

 

노래가 좋아서 환장할 때 노래를 부르면 그 속에 빠져들고 마는데, 자신이 노래를 잘하는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가수들과 달랐습니다. 공연 앞둔 때 밴드와 함께 철저히 연습하는 것은 물론, 며칠씩 공연이 끝날 때까지 연습하곤 했습니다.

 

눈 감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연습을 많이 했는데도, 밴드가 초죽음이 될 때까지 최선을 다해 연습했습니다. 그는 천재가 재능만 믿지 않고 최선을 다해 연습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연습을 많이 해보았기 때문에 남보다 더 많이 연습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과도한 연습은 부작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너무 최선을 다하다 보면 지치고 기진맥진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활에 지쳐 에너지가 고갈되어 다시 부활하기 위해 긴 휴식이 필요할 때도 있다는 것 같아요. 또한 그가 진짜 좋아하는 것을 털어놓기도 했죠. 나는 비즈니스가 좋았어요. 김지미 씨랑 대전에서 결혼식을 했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서 작업복 입고 일을 하면서 즐겁게 지냈어요. 내 스타일이 그래요. 그는 이렇게 "노래보다 사업이 더 좋다"고 말하기도 했고, 나중에 실제로 회사를 차리게 되었죠.

 

86년에 자신의 기획사 '아라 기획'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레코드 제작 판매업을 시작한 것은 89년부터였습니다. 이 사업으로 벌어들일 수입이 가수 수입만큼 들어온다고 밝혀 당시 재산이 수백억에 이를 것이라고 했는데요. 지금은 수천억대를 예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또 한 가지 딜레마는 그는 아버지에 대해 죄송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천하의 나훈아가 되었지만, 73세에 돌아가실 때까지 가수가 된 자식을 용서하지 않으셨어요. 그런 사실이 나훈아 씨에게 평생 한으로 남아 경기도 이천에 있는 아버지의 산소에 일년에도 몇 번씩이나 들려 푹푹 울고 온다고 합니다.

 

최근 내놓은 신곡 '테스형'에 나오는 '테스형'이 바로 돌아가신 자신의 아버지를 뜻한다고 하죠. 세상이 왜 산소에 재미있고, 그가 가끔 더욱 노래를 부르기 싫어하는 것이 아버지의 영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남자는 같은 남자인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평생 간다고 하잖아요.

 

그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이제는 나훈아 씨가 대중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를 주고 존경을 받는지 아셨을 거고, 그래서 아들을 인정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의사나 판검사가 그처럼 많은 사람과 존경을 받을 수 있을까요? 택도 없습니다. 이미 아버지는 나훈아 씨를 자랑스러워하고 계실 거예요. 그러니 앞으로 아버지 무덤에 가서 울지 마시고 웃으셨으면 합니다.

 

이런 몇 가지 이유들 때문에 긴 공백기가 생기거나 자매를 한 것 같은데요. 인생은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노래에 가장 큰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노래 부르는 것을 싫어했다니 그런데도 불구하고 가장 아름다운 예술로 꽃피웠습니다. 사람이 뭔가 이룩하기 위해서는 피나는 고통이 밑받침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고, 그가 고통을 참고 찬란하게 승화시킨 예술에 대해 더욱 경의를 표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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