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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미는 사후 막대한 재산을 남겼지만, 두 아들은 유산 상속권을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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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ielalochte01 2023. 6. 10.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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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미 씨와 이봉조 씨 사이에서 피해를 가장 많이 본 사람은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산 한 푼 받지 못하고 병만 얻은 꼴이 되었죠. 미국으로 이민을 간 이후, 두 아들은 별세 후 3일 만에 빈소를 차리게 되었습니다. 두 아들이 어머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또한 현미 씨의 마지막 유언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봉조 씨는 유부남인 줄 전혀 모르고 만나 아들 둘이나 낳으며 무려 20여년을 함께 산 현미씨의 부인은 전혀 노출되지 않았기에, 언론에서도 현미 이봉조 씨는 공식적인 부부였으며 심지어 잉꼬부부로 소문이 자제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봉조 씨는 현미씨와 함께 사는 동안 여러 차례 바람을 피워 심지어 두 집 살림을 하면서 그의 부인에게도 두 명의 아이를 더 낳았습니다. 이 사실을 현미 씨는 뒤늦게 알게 되었죠.

 

그녀는 그와 헤어질 결심을 하고 두 자녀를 데리고 나와, 1975년쯤 빈털터리로 시작했습니다. 대출을 얻어 같은 단지 내 아파트에 집을 장만한 후, 현미 씨와 엄앵란 씨는 서로 오고 가며 친하게 지냈습니다. 현미 씨는 야간 업소에서 노래를 불러 돈을 벌어가면서 두 아들을 혼자 키웠습니다. 그러나 이봉조 씨와의 문제로 자녀들이 상처를 많이 받을 것을 염려한 현미 씨는 자녀들을 1979년 미국으로 유학을 시켰습니다. 돈이 많거나 허영심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이봉조 씨와 헤어진 지 13년 뒤, 현미 씨는 그가 많이 아프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를 찾아갔습니다. 부인에게 가지 않고 그동안 자신이 어떻게 지냈는지 말했습니다. 홀아비로 살고 있었다고 해요. 그는 다시 자신을 받아달라며 눈물로 호소했는데, 당시 당뇨 합병증으로 틀니를 끼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에 정이 많고 마음이 약한 현미씨는 다시 재결합하기로 약속을 했어요. 기자회견을 하고 합하기로 날짜까지 잡았습니다.

 

그러나 일주일 후 신우에게 연락이 와 그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것을 듣게 됩니다. 그의 사후 또 한번, 현미씨와 아들들은 상처를 받습니다. 이봉조 씨가 바람을 피운 것보다 더 잘못한 것은 두 아들을 그때까지 호적에 올리지 않은 것이었어요. 현미씨는 물론이고 두 아들은 호적 때문에 상당 기간 고통을 받았습니다. 끝까지 그의 부인과 이혼하지 않아 그의 자녀는 법적으로 그의 부인이 낳은 4명의 자녀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법적으로 소송을 하면 현미씨는 몰라도 친자녀는 상속을 똑같이 받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현미씨와 자녀들은 상속을 포기합니다. 이봉조 씨의 재산을 가지고 싸우는 것을 아버지가 싫어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해요. 현미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편이 죽은 후, 난 제사는 단 한 푼도 받지 않았다. 전 아내가 모두 가져갔다. 변호사가 충분히 재산 일부를 취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아들들이 아버지가 싫어하실 일은 끝까지 하지 말자고 말해, 정말 한 푼도 챙기지 않고 더욱 열심히 살아왔다."

 

이렇게 이봉조 씨는 살아생전에도 그랬지만, 돌아가시면서도 현미씨와 두 아들에게 가슴 아픈 상처를 남기고 말았습니다. 두 아들은 아버지 호적에도 올라가지 못했고, 재산도 단 한 푼도 받지 못하게 된 것이죠. 아마 두 분이 재결합을 하셨다면 그런 문제를 처리했을 거라 생각되는데요.

 

그러기 전에 갑작스럽게 돌아가시는 바람에 끝내 일이 이렇게 된 것 같습니다. 두 아들은 중년이 되어서야 아버지를 용서를 구하는 말을 했지만, 그동안 많이 힘들고 상처를 입은 것 같아요.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으니, 이제서야 마흔 살에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게 됐다는데요. 돈이 아니더라도, 현심이 들쑥날쑥한 건 어쩔 수 없죠.

 

자녀들에게 줄 게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아요. 현미 씨는 한국에서 홀로 40년 넘게 살다가 안타깝게도 별세하셨는데, 남겨줄 것이 없으면서 빚만 남겨져 있으면 참 힘드실텐데요. 밤마다 일하면서 돈을 벌었는데, 2015년에는 '사람이 좋다'에 나와서 사기를 당해 수십억의 돈을 잃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비까지 받았다고 하네요. 7억 정도의 빚이 남았다고 하니, 사람을 너무 잘 믿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저희는 10년째 같이 일하고 있어요. 그런데, 지난 1년 동안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도 그녀가 불쌍해서 그때는 매니저가 그녀를 도와주고 있었죠.

 

그 매니저 증언을 보면, 이봉조 씨와 함께 일하면서 현미 씨가 왜 이렇게 철저하게 속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현미 씨는 이런 사람이었어요. 그녀는 돈보다는 항상 자식들을 걱정했어요. 두 아들의 건강이 항상 걱정이었는데,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은 없고, 좋지 않은 유전자만 물려받았다고 합니다.

 

특히 큰 아들은 심장 질환이 있어서 생사의 위험이 많았는데, 어느 날 심근경색으로 일주일 동안 잠에서 깨지 못했다고 하네요. 그는 숨을 거의 거의 거의 쉬지 않았다고 하네요. 둘째 아들은 부동산 업을 하고 있으며, 몸이 약한 형을 대신해서 자기가 가정을 챙기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습니다.

 

스트레스가 당뇨에 더 안 좋은데, 그래서 현미 씨는 팔순이 넘어서도 아들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아들들과 떨어져 한국에서 외롭게 혼자 살면서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부모님 때문에 여러모로 고생이 심했던 두 아들은 어머니를 과연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세상에 누가 뭐래도 저한테는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나의 엄마예요. 엄마 사랑해요. [음악] 많이 많이 나도 사랑합니다.

 

현미 씨는 살아생전 자기는 죽으면 두 아들이 있는 미국으로 가서 묻히고 싶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죽어서라도 아이들 곁에 있고 싶다는 엄마의 마음이죠. 아무도 자기를 찾지 않는 때가 되면 미국 아들들 곁으로 가서 자기 아들 둘을 돌봐준 할머니 곁에 묻히고 싶다고 말해 왔습니다.

 

그런데 대한 가수협회장으로 5일간 장례를 치르는데, 11일 오전 발인하는데요. 장지는 서울 추모공원으로 발표되었습니다. 그런데 오후 들어 새로운 뉴스가 떴습니다. 어머니의 유언대로 미국으로 모셔 가기로 했다고 해요. 발인은 11일 오전 10시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 절차를 마친 뒤, 공인의 유해는 두 아들이 거주하고 있는 미국으로 향합니다.

 

큰형은 나도 동생도 미국에 거주한지 오래됐고, 아무래도 이곳에 모시면 자주 찾아뵐 수 없기 때문에 이제라도 모시고 가서 자주 뵙기 위해 미국으로 모시기로 결정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어머니의 소원이자 유언을 지켜 주셔서 감사드리고요. 이제 현미 님은 아드님들 곁에서 늘 행복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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